한창수 (조선귀족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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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. 본문
한창수(韓昌洙, 1862년 1월 19일 ~ 1933년 10월 7일)는 조선 말기의 관료이자 일제강점기의 조선귀족입니다. 본관은 청주이며, 자는 경문(景文), 호는 영애(穎愛)입니다.
생애 및 활동:
- 1888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, 승정원, 예조, 학부 등에서 관직을 역임했습니다.
- 1898년에는 주차(駐箚) 영국·독일·이탈리아 공사관의 참서관으로 임명되었고, 1899년에는 외부 참서관이 되었습니다.
- 1900년부터 1903년까지 창원 감리 겸 부윤을, 1905년에는 무안 감리를 지냈습니다.
- 1906년에는 보빙대사 이재완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훈3등 욱일장을 받았습니다. 귀국 후에는 의정부 외사국장, 참찬, 형법 교정관 등을 역임했습니다.
- 1907년에는 내각 서기관장, 각부 관제 조사위원장 등을 맡았습니다.
- 1908년에는 동양협회 회원으로 가입하고, 문관 고등전형 위원장이 되었습니다.
- 1909년에는 '이등박문 추도회' 설행 위원장을 맡았습니다.
- 1910년 한일합병 이후,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습니다. 조선귀족회 간사, 이왕직 장관 등을 역임했습니다.
- 1933년 사망했으며, 그의 작위는 서자인 한상억에게 승계되었습니다.
친일 행적:한창수는 일제강점기에 남작 작위를 받고,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, 이왕직 장관 등을 역임하며 일제에 협력했습니다.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되었으며, 친일파 708인 명단, 친일인명사전,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습니다.
사후:한창수의 작위는 그의 서자인 한상억이 습작했습니다. 한상억 또한 친일 행적이 있으며, 동요회 발기인, 조선유도연합회 참사 등으로 활동했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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